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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인터로 세상을 그리다. 잠자는 큰산 [200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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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산그림
  • 등록일 : 2015-06-06
  • 조회수 : 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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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 연휴를 이틀 앞둔 늦은 오후. 홍대에 위치한 잠산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동료 작가들과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그의 작업실은 은은한 조명 탓인지 무척 아늑해 보였다. 덥수룩한 수염과 턱 벌어진 넓은 어깨가 인상적인 작가 잠산. 사실 그의 본명은 강산이다. 잠이 많아 잠산, 잠재된 산 잠산 등 필명에 대한 뒷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본인도 이젠 강산보다는 잠산이라는 이름에 더 애착이 간다고. 이유야 어찌됐든 잠산 이라는 독특한 이름만큼 그의 첫 인상도 결코 평범하진 않다. 터프해 보이는 외모에 왠지 운동선수가 딱 맞을 것 같은 인상이지만, 그가 짓는 너털 웃음은 금새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이처럼 지극히 남성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한테서 어쩜 저렇게 예쁘고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의 얘기를 듣고 난 후 ‘이 사람이라면 어떤 그림이든 그려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과 실력있는 한국의 일러스트레이터를 만났다는 기쁨에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기자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사실 그의 일러스트는 정해진 스타일과 영역이 없다. 출판 삽화에서 각종 CF, 포스터, 3D 게임 일러스트, 최근에는 박지성을 모델로 한 그래픽 노블까지 그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쳐있다. 작품의 스타일도 결코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하염없이 외롭고 서정적이며 슬픈 느낌이 있는가 하면, 강한 인상과 힘이 넘치는 스타일, 귀엽고 아기자기한 스타일 등등 수천 가지의 작품들이 작가 잠산을 말해주고 있다.




    잠산 작가는 페인터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컴퓨터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페인터의 무궁무진한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게 벌써 12년 전. 예고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대학에서는 만화를 전공한 잠산 작가는 거의 평생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런 그에게 컴퓨터에 깔린 프로그램만 있으면 생각하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과히 혁명과도 같았다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간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페인터라는 도구는 그 때부터 작가 잠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인터넷을 들썩거리게 했던 화제작이 바로 박지성을 주인공으로 한 ‘Be the legend’ 그래픽 노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2년 동안 쌓아온 잠산의 실력과 노하우를 하나로 집대성한 디지털 페인팅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는 3D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잠산 작가가 컨셉으로 잡은 동양적인 여백의 미와 먹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낸 독특한 애니메이션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역시 만화가를 꿈꾸는 작가답게 정교한 스토리와 세련된 연출법을 결합해 그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나타냈다는 평을 듣는다.

    이처럼 다채로운 작품 스타일에 비해 그가 주로 사용하는 툴은 간단하다. 수채화와 4~5가지의 기본 붓이 전부라는데. 같은 툴로 전혀 스타일이 다른 그림을 각기 훌륭하게 그려낸다는 사실이 대단하고 신기하기만 하다.



     


    처음 한솔교육의 교육용 일러스트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는 잠산. 이후 다방면으로 활동을 하며 서서히 잠산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그의 영향으로 많은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에 대해 그는 “사실 저를 모방하는 사람들 덕에 제가 더 유명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시작을 쉽게 하게 되면 나중에 오게 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게 됩니다. 창작의 고통으로 탄생한 자신만의 스타일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런 그에게 좋은 작가의 정의를 물어보니 ‘단순히 테크닉으로 승부하기 보다는 보는 이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감동을 주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작가’라고 말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 ‘새로움을 창작’할 수 있는 작가를 진정한 작가라 생각한다고.

    그가 좋아하는 작가로는 유일하게 「좀머씨 이야기」의 삽화가로 알려진 ‘장자크 상페’가 있다. 서정적인 감성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삽화가 장자크 상페와 잠산 작가와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IMF 구제금융으로 나라 전체가 암울했던 시절. 잠산 작가가 생계를 위해 일러스트를 시작한 해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출판사에서 작가들에게 지급하는 저작료는 거의 변함이 없다고 한다. 사실 3~4년 전부터 잠산 작가를 비롯한 신진 작가들을 중심으로 단가를 올리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지만 그것도 작년 가을 이후부터 경기가 나빠지면서 다시 12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출판사의 세대교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일러스트에 대한 출판사의 인식이 개선되기 전에는 선진국 작가들과 동등한 대우를 바라기에는 아직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라며 갑을 관계로만 작가를 생각하는 출판사의 인식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웹 일러스트 메인 화면 1장에 850만원, 나이키와의 2달 간의 프로젝트로 7천만원이라는 거금을 쥘 수 있는 ‘큰 산’으로 커버렸다. 이에 대해 그는 “프로와 작가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합니다. 계약자가 프로를 원하면 프로가 되는 거고, 작가를 원하면 작가가 됩니다. 일단 역할을 정하면 저 나름대로 정한 원칙에 따라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작가로서 바로 서야겠다는 결심은 늘 염두에 두고 있답니다.”라고 답하며 진정한 작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내비친다.  



     


    그가 꿈꾸는 작품관은 세대와 국적을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는 2006년 제작된 「REBUILDING MEMORI ES 2006 JAMSAM CALENDAR」를 통해 처음 시도했다고 한다. 당시 편집된 작품들은 모두 수채화 느낌의 70~80년대 한국의 모습. 외국인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보여줬던 한국의 상징인 하회탈, 한복, 한옥의 처마 이 외에 진정한 생활 속의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어린 시절의 조각조각 남아있는 어렴풋한 기억들을 다시 모아 표현한 작품들이다. 이 캘린더는 예술의 전당 아트체인에서 판매도 되었다고.

    또 하나 그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개인 작품란에 자주 등장하는 「늪거인」시리즈. 아직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한 장씩 그리고 있다는 늪거인은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한 올 한 올 섬세한 터치로 표현된 머리카락과 수염은 물론 푸근한 표정의 늪거인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정감 가는 캐릭터다. 늪거인과 함께 등장하는 요정과 그림자 늑대 등은 인간 군상의 다른 모습들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자 늑대는 수줍음을 많이 타 본인은 항상 그림자 뒤에 숨어있지만 자신의 그림자는 항상 밝은 쪽을 향하는 소심한 인간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해 봤다고 한다. 그저 단순한 캐릭터의 표현이 아닌 인간의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그림 속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의 작품관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마음을 열고 느껴보니 왠지 알 것도 같다.





    그는 본인을 잡식성이라고 표현한다. 장자크 상페를 제외하고는 딱히 좋아하는 작가나 음악의 장르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그림이든 음악이든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접하는 편이라고. 그런 그도 작업이 잘 되지 않는 날이면 아무 것도 못 한다고 한다. 그저 묵묵히 작업이 될 때까지 기다리며 자신의 감수성을 자극한다고. 매일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잠산 작가라면 슬럼프도 금방 극복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적 감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히 하는 노력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항상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에서 시작된 생각은 주변 사물과 사건을 관찰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저건 왜 저렇게 생겼을까?’, ‘저 사건의 원인은 무엇일까?’ 등 끊임없는 탐색과 상상을 통해 틈틈이 나름의 기준과 논리를 정해 놓는다. 매사 이 같은 훈련을 통해 통찰력과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을 기른다고. 동시에 행복한 상상도 자주 하는 편이다. 요즘 잠산 작가 관심을 두고 있는 대상은 ‘넝마주이’. 그는 넝마주이를 통해 로맨티스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역시 독특한 시각이다. 지저분한 컨셉의 넝마주이를 로맨티스트로 바꿔놓는 그의 마술 같은 창작력이 새삼 놀랍기만 하다.



     


    아직도 자신의 개인 작업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잠산 작가는 후배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 금전적인 이유만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자신만의 개인작업을 틈나는 대로 해나가며 재미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작가로서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혼자만의 도전을 하면서 ‘좋아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라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진정 대한민국의 일러스트와 그 안에 몸담은 모든 사람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그의 마음이 기자에게도 고스란히 다가왔다.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낸다는 작가 잠산.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진정 행복한 공상가가 되는 작가 잠산. 그의 놀라운 상상력과 아직 그 안에 잠자고 있는 내제된 잠재력이 서서히 세상을 변화시키는 날을 기대해 본다.


    Editor_ 전선미 ( E-Mail : guroemong@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