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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랑한 그림, 세상을 잠식하다 [20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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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산그림
  • 등록일 : 2015-06-08
  • 조회수 : 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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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가 그린 그림 속의 등장인물과 닮았네, 하는 생각이 든 건 한참 수다를 떨고 난 뒤였다. 그의 첫인상은 사실 그의 작품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끄덕거렸다. “일 때문에 사람들 만나면 처음에는 ‘이런 거 안 그리게 생겼는데’ 라는 반응이 나와요.” 그 스스로 말하듯 ‘평범한 스타일’이기에 낮에 돌아다니다가 동네에서 실직자로 오해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오히려 밖에 잠깐이라도 나갈 일이 있으면 깨끗하게 차려입는다고. 그러나 얼굴이 장난기로 빛나면서 달싹달싹, 그의 안에 에너지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자 그가 그린 단순한 선의 사람들과 표정이 겹쳐졌다. 점으로 찍힌 눈 두 개, 역삼각형의 입모양으로 해맑은 행복감을 그려내는 작가. 사실은 작가 자신도 내면에 그런 표정을 갖고 있었던 게다.




    자신의 그림과 닮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과 닮은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일까? 그가 단국대와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묵직하고 여운이 많은 동양화와 현재 그의 컬러풀하고 아기자기한 작품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하지만 그는 “동양화와 지금 내 작업은 차이가 크지 않다”라고 단언한다.


     


    “모든 그림은 점, 선, 면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동양화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선’이 가장 강해요. 저는 학교 다닐 때도 선이 강한 그림을 좋아했어요. 대학원 다닐 때는 논문으로 도석인물화를 다루었죠.” 백과사전에 따르면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는 ‘신선이나 불교의 고승(高僧)·나한(羅漢) 등의 인물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주제로 따지자면 종교상 숭배할만한 인물의 상을 그리는 것이고, 화법을 따지자면 백묘화법(白描?法), 즉 채색을 쓰지 않고 순전히 먹으로만 그린 그림을 말한다. 거침없는 먹선으로 인물의 윤곽선을 그려내는 그림. 그러고보니 그의 지금 그림의 뿌리가 어디인지 알 듯도 싶다.

    “동양화, 사실 너무 좋아해요. 제 그림 대부분이 동양화와 접목하고 있죠. 선적인 것 뿐 아니라 면적인 것도 포함해서요.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어요. 어찌 보면 제가 가진 재능의 하나인데. 썩힐 필요는 없잖아요.” 그는 몇 장의 최근 작품들을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번져가는 먹의 느낌이 잘 살아있는 배경 위에 사람들이 노닐고 있다. “동양화를 잘 알아서 전공으로 선택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공부를 하다보니 정말 좋더라고요. 동양화는 ‘자연과 같이 그린다’고들 해요. 화선지에 먹물을 떨어뜨리면 자기 혼자 번지잖아요. 습도, 종이 질에 따라 번지거나 멈추는 게 결정이 되죠. 작가가 100%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자연과 같이’라는 말이 나왔겠죠. 사상 자체가 여유가 있어요. 멋있잖아요.”

    그런 그도 그의 작품의 색감이 동양화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데 동의한다. “1학년 때, 과내 전시회에 한 여자를 그려 낸 적이 있어요. 강렬하고 섹시한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 입술을 빨갛게 칠했는데 선배들이 와서 다들 너무 튄다, 한소리들 하는 거예요. 지금은 채색화를 그리면서 색깔도 화려하게 쓰기도 하지만, 사실 보통 화선지에 그리는 것은 색을 진하게 안 쓰거든요. 동양화 그리던 사람들이 일러스트를 처음 그리면 다들 색감이 많이 가라앉아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그랬고요. 그런데 조금씩 조금씩 밝은 색을 써보니 이게 내 그림과 잘 어울리는 것 같더라고요. 사람들도 좋아하고, 저도 좋고. 그러다보니 색감은 동양화 그릴 때와는 많이 달라졌죠.




    동양화가 그의 작업의 뿌리 중 하나라면, 또 하나의 뿌리는 만화와 닿아있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던 그는 고등학교 때 스토리를 직접 짜서 그린 만화를 친구들과 돌려보곤 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죠.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만화가가 결코 환영받는 직업이 아니었거든요.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혼나는 상황이라 만화책도 몰래 봤고요. 그러니 단순히 만화를 좋아하고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하는 것만으로 만화가를 직업으로 진지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어요. 부모든 형제든 친구에게든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고요.”

    그랬던 그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한 페이지짜리 만화도 그리는 ‘준 만화가’가 될 줄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만화가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스토리를 짜야 하고 칸마다 구성해야 하고, 정말 대단하죠. 제가 짤막하게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만화 장편을 본다든지 애니메이션을 보고나면, 이 사람들은 천재인가보다 싶어요. 한편으로는 자괴감도 들고, 한편으로는 ‘나도 저런 것 하나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해요.”

    이제 와서, 그의 꿈이 여전히 만화가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가 말하는 ‘저런 것’은 만화에 국한되어있지 않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들어있죠. 큰 줄거리들이. 작가들은 누구나 그런 것을 갖고 있겠죠. 문제는 실천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인데요. 내년엔 도전해보려고요. 그게 만화가 될지, 어른들이 볼 수 있는 동화책이 될지, 아이 동화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스토리를 직접 짜서 작업해보고 싶어요.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 그림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미술학원에 다녀본 적도 없었고 미대에 진학할 생각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토목공학을 전공했는데, 진학하고나서야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대에 입대했다가 제대가 가까올 즈음, 그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뭘까” 하는 진지한 고민을 품게 된다. 그때 떠오른 것이 미술이었다. 이전에는 가능성의 하나로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미대 진학. 재능있는 친구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 그곳에 뒤늦게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휴가 때 무작정 찾아간 노량진. 그곳에서 학원을 다니며 7, 8개월동안 입시준비를 했다. 처음에는 그저 “해보지 않고 후회는 하지 말자”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학원수업에 들어가면서 그는 뜻밖의 이유로 불타올랐다. “그때 사실 가장 열심히 그렸어요. 몇시간씩, 말 그대로 엉덩이도 떼지 않고 화장실도 안 갔죠. 처음 학원에 들어갈 땐 쉬워보였는데 막상 그리니까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기본이 없으니까. 미대를 목표로 할 때가 아니더라고요. 너무 부끄러웠어요. 나이는 먹을만큼 먹었는데 다들 저보다 잘 그리고. 자존심이 상해서 입시 때까지 내가 이 미술학원에서 중간은 가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때 그게 제 목표였어요.”

    형태가 안 잡힐 땐 식은땀을 흘리며 고군분투했다. 그 덕분일까, 기본도 없이 길지 않은 준비기간을 거쳤건만 단번에 미대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는 “운이 좋았다”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수능봤을 때, 정말 못 그린다는 소리는 안 들었어요. 중간 정도는 갔던 것 같아요.







    늦게 시작했지만 그는 많이 그림으로써 그 공백을 만회하려 했다. “드로잉을 워낙 좋아했어요. 대학교 때는 지하철에 앉아있는 사람, 식당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닥치는 대로 그렸죠. 외국인에게는 그려서 선물도 했어요. 식당 냅킨 같은데 그려서.” 사실 많이 그린 역사는 훨씬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억하는 한 초등학교 때부터, 그는 닥치는 대로 그려댔다. “연습장 한권은 너무 얇은 거예요. 그래서 세권을 합쳐서 스프링을 다시 끼워서 썼죠. 그 연습장에 게임도 만들고, 만화도 그리고, 정말 많이 그렸죠.” 그 시절의 그림들이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는 그게 아쉽다. “진짜 너무 궁금해요. 제가 초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 때는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지금 보면 어떨지.” 그의 지론은 “많이 그리는 사람은 못 따라간다”는 것이다. “재능이 있어도 많이 그리는 사람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은 듯해요. 물론 재능 있는 사람이 많이 그리면 최고이겠지만요.”







    현재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안 해본 게 없죠.”라고 잘라 말한다. 책표지, 삽화, 일러스트, 만화, 벽화, TV광고, 제품일러스트, 전시 등. 그는 그렇듯 많은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된 이유를 “큰 부담감이 없는 그림”이라는 데서 찾는다. “어떻게 보면 애들이 낙서해놓은 것 같은 제 그림에서 보이는 밝은 느낌을 많이 좋아하시더라고요.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니까요. 책의 내용이나 글의 내용 설명을 도와줄 수 있는 그림이라는 점도 플러스가 되었고요. 그림이 단순하니까 내용을 담기 쉽고 어느 장르든 거부감 없이 잘 어울리잖아요.”



    그 많은 작업 중 가장 힘들지만 가장 재밌는 건 TV광고이다. 광고는 시간이 짧은 반면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더 받지만 그만큼 흥미진진하다. 단행본 작업도 재미있다. 한 권의 책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를 책임지고 맡았을 때의 보람은 다른 것과 견주기 어렵다. “사실, 대부분 저와 잘 맞아요. 제가 재미있게 작업하려고 하니까요.” 이런저런 작업의 장단점을 짚어보던 그의 결론은 명쾌하다. 역시, 그는 그림을 닮았다.





    일 때문에 바빠서 쉽지는 않지만, 그에게 있어 끊임없는 자기개발은 화두다. 따로 시간을 내서 하기 어려운 그로서는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는데, 그 하나는 작업 속에 새로운 시도를 도입해보는 것. “전적으로 저를 믿고 맡겨주는 작업의 경우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스타일을 바꿔보기도 합니다. 늘 똑같은 작업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은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많이 하는 것”이다.

    “저는 그런 엉뚱한 생각과 행동들이 창작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광고도 유심히 보고 상황을 바꿔 생각해봅니다. 심지어 따라해보기도 하고요. 사실 그림도 중요하지만 생각의 발상이 전환되어야 그림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연습을 많이 하는 거죠. 남들과 다른 상상과 발상.”

    그는 우주와 외계인에게도 관심이 많다. 짐짓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실제로 우주선을 본 적도 있다고. 어렸을 때부터 별 보는 것을 좋아하고 걸으면서 하늘보기를 즐기니 남들보다 우주선을 볼 기회도 많을 것이다. “제가 본 우주선에 대해 얘기해도 아무도 안 믿더라고요. 그런데 몇 년전에 BBC에서 생방송 도중에 UFO가 찍혔다는 거예요. 찾아서 봤는데, 아무래도 제가 본 게 그것인 것 같아요. 사실, 지구에만 생명체가 있다는 건 일단 재미가 없어요. 넓은 우주에 우리 말고 다른 존재가 있으면 좋지 않겠어요? 물론 위험하지는 않고 재미있는 존재여야겠지만요.“ 그러한 그의 바램은 그림 속에 충실히 재현된다. 찬찬히 찾아보면 우주복을 입고 있는 친구나 별을 볼 수 있다.

    그의 엉뚱함은 호기심이 가는 사람에게 무작정 연락하여 만나거나, 모델 에이전시에 가서 일반인 모델 오디션을 보는 것, 유명한 동명이인에게 연락하는 것, 예능 프로그램 방청객이나 조연으로 출연하는 등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난 시도했어. 난 생각만 하지 않았어. 이것이 저에겐 중요해요. 그런 경험들이 재미있기도 하고요.”




    그와 이야기하다보면 그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좋아하는 것은 “재미있는 것”. 싫어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 그것은 그가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그림 그릴 때 중요시하는 건 제 스스로 재미있어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든 상황을 재미있게 해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나 스스로도 즐거워하면서 일을 하는 것, 좋잖아요?'




    스스로 즐거워하면서 그린 그림. 비로소 그의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명랑함’이 이해가 된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니만큼 가지는 애정도 각별하다. 그의 작은 작업실을 찬찬히 둘러보다보면, 깨알같은 캐릭터들을 여기저기 붙여놓은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버려지는 것이 불쌍해서 붙여놓았단다. 그의 말이다. “제 그림에 제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캐릭터가 있어요. 앞으로는 생명을 불어넣고 키워줄 생각이에요. 그렇게 묻혀있는 게 불쌍하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더라고요.” 고만고만한 그의 수많은 캐릭터 중, 누가 그가 생각하는 ‘주인공’일까? 앞으로 그의 작업을 꼼꼼히 따라가다보면 만날 수 있겠지. 슬몃, 기대가 부푼다.







    Editor _ 박사 ( catwings@gmail.com )


    대학에서 시와 인도철학을 배운 후, 책, 라이프스타일, 고양이, 여행 등 흥미를 끄는 것들을 주제로 다채로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책으로 『 여행자의 로망백서』, 『 고양이라서 다행이야』, 『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 나의 빈칸 책』, 『 비포컵라이즈 뉴욕』등이 있다